문화생활
신문 지우기 50년, 최병소 작가가 남긴 마지막 질문
50여 년간 신문지 위를 연필과 볼펜으로 지우는 행위를 반복하며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한 최병소 작가의 유작전이 열린다. 지난해 타계한 작가의 첫 회고전으로, 세계적인 갤러리 페로탕 서울이 그의 예술 여정을 조명한다. 전시장에 걸린 흑과 백의 작품들은 언뜻 모노크롬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서면 드러나는 재료의 본질은 깊은 울림을 선사한다.그의 작업은 '지우기'라는 단순한 행위로 요약된다. 인쇄된 글자와 이미지가 가득한 신문지 위를 검은 연필과 볼펜으로 겹겹이 덮어 완전한 검은 화면으로 만들거나, 반대로 아무것도 인쇄되지 않은 신문 용지를 다 쓴 볼펜으로 긁어내 상처와 흔적만으로 화면을 구성했다. 이는 단순한 그리기를 넘어, 지우고 긁어내는 행위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조하는 과정이었다.

1970년대 권위주의 시절에 시작된 이 작업은 초기 '언론 검열에 대한 저항'이라는 시대적 의미로 해석됐다. 한편으로는 한국전쟁 직후 물자가 귀했던 시절,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사용했던 신문지 교과서에 대한 작가의 유년기 기억이 작업의 근원이라는 시각도 존재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작업의 의미는 변화하고 확장됐다. 작가 스스로 '나를 지우고 정화하는 일'이라 언급했듯, 저항의 제스처는 내면을 비워내는 명상적 수행의 과정으로 변모했다. 정보 과잉의 시대에 의미를 상실한 언어를 지워냄으로써 존재의 본질에 다가서려는 철학적 시도라는 평가도 뒤따랐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마지막 10여 년간의 작업 21점을 통해 그의 예술적 궤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타임'지와 같은 해외 유력 매체의 제호만 남기고 지워버린 대표 연작부터, 말년에 이르러 글씨 없는 백지 위를 다 쓴 볼펜으로 채워나간 작품까지, 작가의 변화하는 사유를 엿볼 수 있다.
결국 그의 작업은 신문지라는 일상적 재료와 볼펜이라는 평범한 도구를 통해 '지운다'는 행위 자체를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50년의 기록이다. 전시는 서울 신사동 페로탕 서울에서 3월 7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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